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설계연도: 2011년
대지위치: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24
건축규모: 지하2층 / 지상1층
연면적: 997.90 M2
수상: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About This Project

 

하이퍼폴리스의 기억술, 마로니에 공원 계획
Mnemonics in Hyperpolis, Maronier Park

 

2012년 4월, 마로니에 공원

 

2012년 4월, 4년 동안 진행된 서울 대학로에 있는 마로니에 공원 프로젝트의 온갖 행정절차를 모두 마친 바로 그 다음 날 이 글을 적고 있다. 낯 선 투로 시작되는 글, 이어지는 긴 글 모두에 이해를 구한다. 이 장소의 귀중함, 공공과제에서 요구되는 긴 시간의 사회적 합의 과정, 그리고 망각의 도시 ‘하이퍼폴리스’에서도 우리가 기억을 말할 수 있는지 등, 기록될 의미들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2008년 여름, 한 일간지에 연재하던 칼럼으로 시작해 본다.

 

마로니에 공원, 생성의 공공영역으로

아르코 미술관, 테라스가 백미다. 밤에 특히 좋다. 그러나 거기까지. 다음 시선을 기다리는 것은 노래처럼 슬픈 마로니에 공원이다. 거기 옛 모습 그대로 측은하게 있다.(중략)
모든 것이 휘발하는 이 도시에서 변화가 곧 미덕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공원의 시작을 안다. 그리고 그 황당한 태생을 문화로 재편했던 대학로 장소 만들기의 신화를 역시 안다. 문화로 다시 태어난 넓은 영역 내에서 이곳 마로니에 공원은 그 기원이자 거점이다. 문제는 그 이후 그에 걸맞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략)문리대 자리는 주택지로 팔려나갔다. 조금은 겸연쩍어 작은 공원 하나 남겼다. 바로 이곳이다. 이후 30년, 공원은 그저 그런 도시 공원의 모습으로, 적당히 문화적 냄새를 풍기는 그런 공원으로 살아남았다. 아니 사실 점점 더 나빠졌다. 내용이 단단하지 못한 도시 공간은 사소한 욕망들의 침입을 계속 받게 마련이다. 어느 날 하회탈이 새겨진 분수가 생겼고 정말로 볼품없는 큰 지붕이 덮였다. 조형물, 기념물들이 불쑥 들어왔다. 예총회관에는 군더더기 매점이 붙고 티켓박스, 청소년 선도용 컨테이너까지 자리 잡았다. 미술관의 새 통나무 문은 망가지는 공원과 헤어지고 싶은 미술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학로 장소 만들기의 신화가 진행되었다. 공원 동쪽에 면해 나뉘어 있던 여섯 필지 위에 붉은 벽돌의 새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공원이 만들어진 후 4년, 1979년의 일이었다. 그 중 한 필지는 김수근의 기증이었고 동시에 그는 이 정책의 제안자이자 미술관과 공연장의 건축가였다. 공연장 역시 공원 북쪽 주택지들을 다시 합했다. 지금의 이름으로 아르코 예술극장, 미술관 그리고 문화예술위원회 본관이 마로니에 공원을 온전히 에워싸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마치 옛날 문리대의 문화적 유전자를 복제하는 듯 문화지구 대학로, 동숭동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그 한 가운데, 남루한 이 공원에서 그 힘과 변화는 아직 잠재력일 뿐이었다.
이제 그 잠재력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잠재력에 힘입어 서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도시 공공영역으로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수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상투적인 녹지, 잡다한 시설들을 비우는 계획만으로도 잠재력의 일부는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우선 계획의 과정을 모색해 보고 그 과정 자체를 근사한 축제로 만들어 보자. 누가 이곳을 누리게 될지, 여기에서 어떤 사건들이 기대되는지. (중략)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곳은 어느 공공영역 보다도 여러 다른 곳과의 네트워크가 더더욱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산에서 동대문 그리고 낙산 공원을 흐름으로 이어가려는 서울시의 과제를 보자. 그 흐름 끝 낙산 아래로 대학로 전체 영역이 있고 이곳 거점이 있다. 또 그 옆에는 방통대의 캠퍼스, 뿐만 아니라 대학로 이곳저곳에 스며들어 온 여러 대학의 도심 캠퍼스들이 있다. 선한 인자들이다. 길에 묶여 가두어진 좁은 정책들을 이곳에서는 좀 더 넓고 지혜롭게 펼쳐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공공영역의 네트워크는 더 많은 사건을 부르고 사건은 예기치 않은 생성을 지속시킨다. 그 한 가운데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문화도시 서울의 한 거점, 문화 공공영역의 잠재력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서둘지 말며 한 걸음씩 함께 나설 때가 되었다. (이종호)

그러던 어느 날, 그저 그런 모습으로 30년을 지내온 ‘근린공원’이 ‘재정비 기본계획’이란 이름으로 조달청 입찰에 등장했다.

 

동기/ 도시공공영역, ‘입찰’되다.

입찰은 토목 엔지니어링 회사가 대상이었다. 한 회사가 낙찰되었고 그 회사의 임원으로부터 내게 연락이 왔다. 메타의 옛 스탭이었다. 내가 대학로에 앉아서 오랫동안 마로니에 공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터였다. 이런 과제가 ‘입찰’되었다는 점은 한심하지만 협업 제안은 반가운 일이었다.
나무를 정리하고 바닥을 포장하는 과제에 웬 건축하는 자인가 싶었는지, 발주 기관의 담당들(2008~10년)은 좀 뜨악해했다. 대학로 전체에 대한 이야기, 문화, 도시의 기억 등, 과업항목에도 없는 이야기에 당혹해 하는 것은 이해할 만 했다. 협의하는 과정은 한 편, 교육의 과정이었다. 공식, 비공식의 논의들이 그런대로 잘 진행되고 여러 심의들 또한 무사히(?) 완료해 주니 그때서야 조금 태도가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마로니에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기본계획은 끝이 났다. 다음 단계 작업을 기다리는 가운데 지방 선거가 다가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사이 구청에서는 또 다시 이런저런 다른 구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역 상인들의 요청으로 지하주차장 계획이, 공연 예술인들 희망으로 지하에 큰 공연장 그림이 따로 그려지고 있었다.
2010년, 가을 새로운 단체장이 선출되었다. 신임 구청장에게는 마로니에 공원은 이미 각별한 과제였다. 녹지과의 새로운 담당자들 모두 이전보다는 시야가 넓었다. 우여곡절 끝에, 묻혀있던 기본계획이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 점 내게 다행이었으나 이전과는 또 다른 갈고 긴 논의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공연관계자들, 대학로 포럼 등의 시민단체들, 주민들을 비롯해 대학로에 관계하는 온갖 분야의 사람들과 단체들이 논의의 대상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곳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작가, 문리대 이적지 기념물을 남겨 놓은 서울대 동창회, 김상옥 열사의 유족회, 장애우 협회 등등 아주 넓은 범위의 대상들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가진 희망과 그들 사이의 갈등 모두가 다 드러났고 논의되고 조정되었다. 긴 과정은 적어도 우리 사회의 공공적 과제의 진행에서는 이제 본격적인 협치, 즉 ‘거버넌스(governance)의 과정’이 절대적인 단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역력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과정/ 가버넌스 과정의 진수를 겪다.

지하로 위치시켰던 공중 화장실은 논란을 거듭하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마침 있었던 도심 홍수의 경험이 한 층 깊이로 내려가던 야외 공연장을 완만한 깊이로 조절시켰다. 그것들 말고도 논의가 당초의 계획을 변화시킨 것들이 적지 않다. 서로 이유가 닿는다면 기꺼이 조정될 수 있었다. 도시 연구 과제를 진행할 때마다 강조해 마지않던 ‘협치‘라는 그 단어 아니었던가.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계획들은 지속되었다. 그 중 하나는 마로니에에서의 인식 영역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필수적인 한국 문화 예술위원회와의 협력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공원의 태생적 한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할의 문제였다. 모두의 인식 속에 마로니에는 공원과 건물 영역이 하나이지만 기실 그 속에는 구청과 위원회 사이에 소유 영역이 엄연히 나뉘어 있다. 한 때 이 모든 영역의 관리가 문예진흥원(위원회의 전신)에게 위탁된 시기도 있었지만 어설프게 조각공원을 시도하다 실패한 일도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술위원회와의 대화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 시키지도 않은 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의 해임 사태가 일어났다. 논의의 상대가 다시 정해지기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다시 두 기관 사이의 대화를 중재하게 된 것도 지방선거가 끝나고 계획이 재개된 직후였다. 김종영 신임 종로구청장은 그 자신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던 건축가다. 그러니 긴 설명이 필요 없었고 문화예술위원회의 이해, 구청의 재정적 양보가 쉽게 맞물렸다. 그렇게 해서 마로니에 공공영역은 계획과 관리의 경계선이 없는 하나의 영역이 되었다.

 

생각/ 최대화, 최소화. 최적화.

마로니에 계획은 ‘공원’계획을 넘어 하나의 중요한 ‘도시 공공영역’의 계획이어야 했다. 공공영역과 공원은 넓은 의미에서 서로 교집합의 관계를 가지지만 그것을 도시의 공공영역으로 부르게 된다면 둘의 차이는 분명해 진다. 도시 공공영역이란 시민들이 자본 또는 제도의 영향을 벗어나 자발적인 소통과 연대를 구할 수 있는 공공성의 영역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도시학자 조명래의 말을 빌리면 도시 공공영역은 한 사회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 즉 삶의 공공성이 발현되고 보장되는 사회적 영역이다.
대부분의 공공영역은 공공에 의해 설정되고 그 틀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마로니에는 독특하다. 대학교 교정이 엉뚱하게 주택가의 근린공원으로, 다시 우연찮은 과정들이 포개어 지면서(위에 서술되어 있듯) 자발적 조직화의 과정을 거쳐 잠재력 가득한 도시 공공영역으로 진화해 나온 특이한 장소라는 점이다. 계획은 단지 그 잠재력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통로를 준비해 주는 일이면 충분했다. 그것이 세 가지의 원칙, 즉 인식 영역의 ‘최대화’, 시설의 ‘최소화’, 환경의 ‘최적화’라는 아주 단순한 원칙이었다.
인식 영역의 ‘최대화’는 이미 달성되었다. 이 영역 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 이유 없는 도로들이 사라지고 보이는 담장들 역시 지워지기로 되었다. 시설의 ‘최소화‘는 가능한 한 지상을 비워내는 일이다. 한전 시설물, 거대한 야외공연장 시설, 근린공원 시절부터 누적된 잡다한 시설들이 그 대상이다. 환경의 ’최적화’는 어쩌면 경관의 문제다. 관목과 교목, 침엽과 활엽이 혼재하는 풍경을 활엽 교목의 본래적 풍경으로 만들어 내는 일 또한, 적어도 새로운 공원 심의 이전까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 나도 심의를 하는 자리에 앉아보지만 작업의 주체는 분명해야 한다. 다른 세계관을 작업에 섞으려 하면 그게 어디 심의인가. 참으로 안타깝다. 광화문 광장이 저 꼴인 것은 장소의 존재 자체가 불안한 이유도 있지만 시민들에게 유예되고 비워 있어야 할 장소에 온갖 상징의 이유가 달린 값싼 욕망들을 너무나 많이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마로니에 역시 마찬가지다. 공공이 돌보지 못했음에도, 아니 돌보기는커녕 계속 장소를 망가뜨려 왔음에도 스스로 공공영역의 잠재력을 길러온 이곳에 또 무슨 상징을 심으려 한다는 말인가? 마로니에 나무들 보다 더 중요한 상징이 있을 것이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한심하게도 그런 허망한 요청 등에 의해 반년의 시간과 노력을 더 허비해야만 했다.

 

전개/ 마로니에 나무보다 중요한 것이 이곳에 또 있을까?

1. 1929년에 심어졌다는 마로니에 나무. 학교에서 주택단지로 다시 ‘문화지구로 바뀌었어도 세대를 잇는 기억으로, 장소의 이름으로 남은 것이 그 나무의 이름이다. 기실 이곳에 마로니에는 여덟 그루뿐이다. 나머지는 나이가 꽤 된 은행나무, 버즘나무들이지만 이 장소는 마로니에라는 이름으로 젊음, 문화, 도시에서의 푸르름이라는 아우라를 이어오고 있다. 이곳에서 마로니에는 장소 형성과정의 전형적인 에이전트이며 이 영역의 잠재력을 만들고 또 붙잡고 있는 아주 강력한 주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그와 같은 잠재력을 발현시킨다는 일은 마로니에(다른 활엽수들을 포함하여)를 온당하게 이 장소의 주체로 자리매김 시키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2. 나무는 이 영역 내에서 ‘위치’하고 있다. ‘위치’로부터 솟아 가지를 뻗고 그늘을 만든다. 여럿이 모여 장관이다. ‘위치’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상수였으며 그 상수 아래에서 수많은 활동과 사건들이 변수처럼 일어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그 ‘위치’가 장소 잠재력의 근원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점과 점들 사이의 역학이 만들어내는 보로노이(voronoi)도형의 의미가 최적화될 수 있는 ‘위치점’들이다.

3. 나무들 이외에도 이곳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한 활동의 ‘위치‘들이 있다. 주위의 흐름 속에 다수가 모이게 되는 곳, 정적인 머묾이 필요한 곳 들이다. 공연이 벌어지거나 쉬는 곳에서 필요한 작게 나뉜 영역들도 있다. 주변에서 이어지는 흐름이 마로니에 영역과 만나 섞여 들어와야 하는 지점도 있다. 그 지점들 또한 활동의 영역을 생성하고 구성하는 ’위치점‘들로 간주된다.

4. 미술관은 마로니에 영역 뿐 아니라 대학로 전체 도시장소 형성의 시발점이다. 주택가로 팔린 동네를 대표적인 문화지구로 바꾼 장본인이다. 묘하게도 미술관과 공연장의 입구는 편심으로 있다. 옛 문리대 본관도 그렇다. 이 편심들이 회전하듯이 마로니에 공원에 움직임을 주고 있다. 이 건물들의 외곽선과 함께 건물들이 주는 움직임들과 관계하는 선들이 있다. 뿐만 아니다. 대학로 차도는 이 영역 앞을 비스듬히 휘어 지나간다. 그리고 방통대로부터는, 앞으로 개방될 위원회 영역을 따라 들어오는 흐름을 적극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흐름의 관계선을 따라 지상의 시설들이 최소한으로 자리 잡는다.

5.지상의 시설들은 하나는 공중화장실, 다른 하나는 마로니에 안내소이자 지하 공간 연결체다. 그저 투명한 유리상자다. 나무의 위치로부터 자라난 보로노이 선들이 바닥의 패턴과 나무 밑 벤치를 만들고 야외극장이자 쉼터의 작은 높이 차이를 만들었으면 족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 걸음 더 나가고 싶어졌다. 그 유리상자의 구조가 되었고 외벽을 타고 내려오는 배수관으로까지 영향을 주고 말았다. 과도하지 않기를…

 

하이퍼폴리스(가설)

하이퍼폴리스(Hyperpolis)는 서울로 대표되는 아시아의 도시에 대한 규명 이전의 명명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빨리, 대규모로 성장했던 도시들이자 기왕의 도시 이론들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도시들이다. 그 속에서 벌어져야만 할 ‘하이퍼폴리스의 도시건축’은 8년 전에 시작된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전문사 과정의 탐구과제이기도 하다.
하이퍼폴리스는 각 도시들이 가진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적 압축과 농축의 과정들을 공유한다. 그 과정의 결과 혼성적이며 다중적인, 수많은 계열들 사이의 교차라는 특유의 현상들을 또한 공유한다. 하이퍼폴리스의 도시화 과정은 매우 불연속적이다. 그 사이사이 균열이 내재된 아시아 근대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균열은 삶을 담는 형식인 도시-건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 균열은 치유의 대상이기보다는 새로운 잠재력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하이퍼폴리스의 잠재력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가능한 것은 그 잠재력에 대한 지속적 탐구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상상력 가득한 질문들이 있을 뿐이다.
하이퍼폴리스의 탐구는 도시를 최종 목표로 삼지 않는다. 건축 또는 도시건축이다. 도시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새로운 건축을 위한 토양이었다. 로시(A. Rossi, <Architettura della Citta>), 벤츄리(R. Venturi, <Learning from Las Vegas>) 그리고 쿨하스(R. Koolhaas, <Delirious NewYork>)가 그랬다. 자신의 도시에 대한 규명 없이 건축의 당대성이 드러났던 일이 없다. 그러나 그 답을 누가 알 것인가. 사실 쉽게 드러날 리 만무하다. 실천의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도 않는다.
실천은 겨우 작은 것들에서 일어날지라도 새롭게, 섬세하게 보려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 미시적인 작업들이 모여 일정한 이야기를 생산할 수,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문화역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 ‘건축한계선’ 속에서도 충분히 읽혀지는 일이다. 그들 중에는 심오한 근대주의자(Modernist)도 없고 터무니없는 매개변수 조정자도 없다. 이 도시가 저 도시와 다르다는, 그래서 그 리얼리티 속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낮은 목소리임에도 뚜렷한 인식만이 있을 뿐이다. 실천 이전에 읽어내야 하는 과제들이 아직 널려있다.
하이퍼폴리스의 탐구를 위해, 한예종 건축과에는 도시건축연구소(IUA라 부른다)가 설립되어 있다.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2005~6년에 진행되었던 광주 문화도시 기본구상이었지만 내게 도시 작업은 그 이전에 진행했던 고창, 양구, 춘천 작업의 연속이었다. 사실 더 추적해 본다면 sa의 도시 워크숍이 그 뿌리다. sa 워크숍은 내게는 훌륭한 학교였고 그곳에 모여 한 여름을 봉사했던 수십 명의 튜터들 모두는 내게 훌륭한 가정교사였다.
학교의 연구소를 통해 본격적이며 다양한 도시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대부분 법제 연구가 아닌 자유로운 비전 연구들이다. 광주에 이어 순천 문화도시 연구, 무주, 나주 도래마을 연구가 이어졌다. 아산의 기원인 영인면과 봉평처럼 작은 면 소재지를 들여다보았는가 하면 경기도 내 한강과 임진강 전체 유역에서 사대강과는 다른 시각의 가능성을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함께 라는 것은 학교의 다른 선생들 뿐 아니라 그 과제에 모인 다양한 분야의 초빙 연구진들이었다.
즐거운 논의가 계속되고 일정한 시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우리 도시 어디에서나 그 상태는 착종(錯綜)이었다. 옛것과 새것들이 착종되고 계열과 축척이 서로 다른 것들이 겹으로 착종되어 있었다.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혼돈의 상태였다. 그런데 혼돈은 질서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던가? 그 혼돈과 착종 속에서 묘한 가능성들이 꿈틀댐을 본다. 아니 아직 보이는 것은 아니다.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벤츄리가 이야기했던 복합성(Complexity)이 그저 다원의 차원이라면 이곳에서는 그것과 차원이 제곱으로 다른 복잡성(Complexity)이었다.
이 생각들이 계속 도시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착종으로 엉킨 실타래를 일부 풀어내고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다시 감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선 도시 공공영역들을 네트워크 시키는 다른 방법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 생각들이 만일 건축으로 접속된다면, 그것은 착종의 현상이 수용되어 기왕의 오랜 미적 판단의 기준들이 작동되지 않는 다른 즐거움의 건축을 만들게 될 것이다. 사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모더니즘의 망령을 떨쳐 내면서 말이다. 참 이상하다. 실제로는 그 강령을 따라 실천했던 경우도, 능력도 없었는데 매 작업마다 머릿속에는 언제나 어설픈 근대 추상의 구조가 한 무더기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기억술
건축으로만 본다면 나의 작업은 대개 기억에 관계하는 공공의 일들이다. 무수히 떨어지고 어쩌다 붙는 작은 프로젝트들이기 때문이다. 그 과제에서 요구되는 기억의 욕망, 기념의 강요가 상투적이라고 느낀지 오래다. 즐겁지 않다. 그 상투성을 뒤집어 강요를 피하는 법, 그래서 진정한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는 법이 매 프로젝트에서의 주된 관심사다. 역사 이래 기억의 욕망과 건축의 관계는 이미 모두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유로운 작가들이 그 욕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이에도 여전히 건축가들은 그 욕망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꼽는 최악의 기념물이 있다. 베를린 한 복판에 있는 피터 아이젠만 작, ‘유럽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메모리얼’이다. 관 크기의 콘크리트 덩어리 수천 개가 베를린 도심 한 블록을 폭력적으로 뒤덮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한 도시의 심장부를 짓누르는 동안 호하이젤(Hoheisel)이라는 조각가는 독일의 ‘최종 속죄’를 위해 ‘아예 브란덴부르그 문을 부수어 그 돌들을 운터 데어 린덴 가로 바닥에 깔아주면 어떠한가?’라는 역설적 프로젝트로 질문하고 있다.
기억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관심은 아마도 명지대 방목기념관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학교 설립자의 기념관이 오히려 전망 좋은 식당이 되어 기념이 일상으로 되는 것. 동시에 자칫 지루한 캠퍼스를 교란시키는 호기심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박수근 미술관에서는 결국 화가와 방문객이 만나야 하는 문제였다. 그림을 담는 미술관에 앞서 청년 박수근을 만들었던 풍경을 방문객이 함께 보는 장치로써의 미술관이 더 큰 관심이었다. 그러니 미술관은 얕은 구릉의 풍경 속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광주 비엔날레 남광주역 전시장은 이미 사라진 철길과 철도역을 오히려 직설로 환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히려 이곳에서는 운동가들 이외에는 아무도 폐선부지의 기억을 정면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화여고 백주년 기념관은 사실 온건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남성들로 구성된 이사진들에게는 불온한 프로젝트가 되어 버렸다. 프라이 홀이 있던 자리이기에, 그 벽돌들이 교정에 아직 깔려 있었기에 그것들과 관계하는 소소한 기억의 장치들은 마련되어 있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학교 설립자인 스크랜턴 여사의 건학정신이었다. 그 정신이 말하는 여성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진취를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시설의 반이 학교보다는 정동 길을 향해 열려 설립자가 말하는 책임을 다하고 있다. 분원 백자관과 이순신 기념관이 그 뒤를 따른다. 백자관은 정확하게는 백자를 만들던 도요지 발굴 기념 박물관이다. 그러니 멋진 달 항아리 분원 백자보다는 깨진 파편들과 도공의 기억이 더 앞에 나서 있어야 했다. 이순신 기념관은, 어쨌든 서 있다. 감리를 못하는 사이에 내부에 이상한 4D 상영관을 만들어 놓아 아직 가볼 용기를 못 내고 있다. 하지만 하고자 했던 일은 분명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해방이었다. 그리해서 상식 속의 장군이 아닌 각자 내면의 장군이 될 수는 없는가에 대한 시도였다. 십년 안에 그 이상한 상영관은 사라지고 원래 설계된, 인간 이순신에게 가장 중요한 난중일기의 방이 만들어질 것이다.
노근리 역사 평화박물관은 미군에 의해 벌어진 양민 학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전체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 굴다리 안에서 죽은 이들이 체험했을 그 공포와 유족들의 고통이다. 섣부른 애도는 금물이다. 어떤 정치적 윤색도 안 된다. 오직 상실의 아픔만이 있을 뿐이며 학살의 현장을 바로 앞에 둔 기념관은 오직 그 장소로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일 뿐이다.

 

하이퍼폴리스에서의 기억술

내게 기억의 건축과 도시연구는 연구소와 사무실을 오가는 생활만큼 언제나 이중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마로니에 프로젝트는 그 이중성을 타고 넘었다. 사무실과 연구소가 모두 계약의 당사자였고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상황이 마구 바뀌어도 백년 가까이 마로니에 나무가 붙잡은 것들, 스스로 조직해 낸 도시 공공영역의 장소성, 누적된 기억들이 모두 기억의 건축에 주된 과제였다. 훈고의 기억이 아닌 생성의 기억을 묻는 과제가 되었다. 생성의 기억은, 착종의 장소들이 가진 잠재력을 현실화시켜 내겠다는 하이퍼폴리스의 작업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것은 또한 긴 시간 속, 가버넌스-협치의 과정을 즐거이 감수하며 진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이퍼폴리스에서의 기억술이 무엇인지 아직 충분히 모른다. 그런데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기능과 효율이 중요한 것, 선험적인 것, 환원적인 것,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 동일한 것 등이 앞줄의 목록이라면 도시를 경관, 이미지로 보는 것, 구조로 보는 것, 집단의 기억으로 보는 것 등등이 그 뒷줄에 늘어선 목록들이다. 마로니에 계획의 경험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하이퍼폴리스에서의 작업이 그 목록들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 현장의 지층이 말해주는 것들에 얼마나 더 집중해야 하는 가였다. 그리고 하이퍼폴리스의 작업이 타블라 라싸에서의 작업과 달리 장소의 생성을 위해 발생의 장치로써 기억술을 어떻게 조직하는 가였다.